본문 바로가기

추천명소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유적지 영주 소수서원

조선시대 최조의 사액서원이자 최고의 사립학교였던 영주 소수서원.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건립한 백운동서원이 전신입니다.

성리학이 조선의 통치이념이였으니 서원은 성리학을 섬기는 후예를 기르는 첨병 이었지요.

백운동서원은 1549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임금인 명종에게 청원을 하여

서적이나 전답, 노비를 국가에서 지원하는 '사액'을 주청하고 이에 명종은 1550년  친히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적어

하사하게 된다. 이때부터 백운동 서원은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으로 불리게 됩니다.

소수서원의 자세한 모습은 아래영상에서 감상 바랍니다.

 

조선시대 서원의 주된 역활은 두가지 였습니다.

하나는 성리학의 대가인 문성공 안향 제사를 지내는 것과 성리학 후학을 길러내는 학교 기능 이었지요.

어느 것이 주이었는지 모르겠으나 21세기에 사는 나의 관점으로 보면 성리학으로 조선의 최고 엘리트를 무장시킨

것이야말로 세계사의 흐름을 읽지 못한 외눈박이 지식인을 양산한 것이 조선말 참담한 외세침탈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서원 입구에는 경렴정이라는 죽계천을 조망하는 멋진 정자가 있습니다.

서생들이 시연도 하고 연회도 하던 그야말로 풍류를 즐기던 곳입니다.

풍류에 술과 가무가 빠질리 만무하고 기생의 노랫자락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경렴당 옆에 흐르는 죽계천을 보면서 말입니다.

죽계천.......

계유정난을 통해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에게 반기를 둔 금성대군이 영주 순흥으로 귀양을 오게 됩니다.

순흥부사와 의기투합, 반정을 꾀하나 고변으로 결국 실패하고 말지요.

그 일로 순흥의 수많은 사람들이 참변을 당하고 죽계천에 매몰됩다고 합니다.

한 켠에는 왕정을 지탱하는 유생 서원과 한 켠은 반정으로 왕을 몰아내려던 원혼이 서려 있는 곳.

영주 소수서원은 그런 곳 입니다.

역사를 되돌리수는 없지만 지금 그 시절로의 돌아가 유생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조선의 말로가 어찌 했는지 말입니다.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소수서원.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에 답답한 마음을 내려 놓습니다.